꽃다운 나이, 방년86세입니다.
꽃다운 나이, 방년 86세입니다
3월 초순입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그랜드힐튼 호텔에 들렀다. 정중한 옷차림을 한 할머니가
내 앞에서 서면서 "혹시,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님이 아니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렇습니다"
하면서 쳐다보았으나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50여년 전에 정부가
주관하는 방송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함께 회의에 참석하곤 했던 S대학의 김모 교수였다.
김교수는 나를 보면서 "몇 번 뵌 일은 있는데 너무 젊어보여서, 결례를 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 면서 "저도 방년(芳年) 86세가 되었습니다"라고 웃었다.
86세에 꽃다운 나이라니. 내 나이가 99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때 위원장으로 계셨던 E총장 기억하세요?"라고 물었다.
"너무 옛일이 되어서 모르겠는데요"라고 답이 돌아왔다. 이상하다 싶은 샐각이 나서
"E총장이 아마 김교수님을 혼자 좋아 하셨는가 보다"면서 웃었다
50년 전 모임서 알게 된 여교수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다
그녀를 짝사랑한 E총장과 함께
차 마시러 찾아간 생각이 나 물었다
"E총장 기억하세요?"
"그때 김교수님이 오신 건 생각나요"
김 교수는 무슨 뜻인가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설명을 했다. 한 번은 E총장이 연세대로 나를 찾아와
함께 S대학의 김 교수를 찾아가자고 청한적이 있었다. 나는 무슨 공적인 일이 있는가 싶어
무슨 일로 같이 가자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E총장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S대학의 김교수가 드물게 보는 미인이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차라도 함께 마시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가슴이 떨리고 민망해서 나를 동행자로 택했다는 것이다.
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이기 때문에 도중에 돌아설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자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다라간 셈이었다.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온 것 같은데 그 정도 밖에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생각해보니 E총장이 김교수를 짝사랑했던 것 같은데요"라고
놀렸더니 김 교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그리고 내게 "E총장은 지듬 어디 계시는데요?" 라고 물었다.
내가 "세상떠난 지 오래 되었지요"라고 했더니 김 교수가 웃음 띤 음성으로 "그러면 아나 마나지요?"
했다. 둘이서 함께 한참을 웃었다. 오늘은 김 교수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회원들에게 내가 강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복도에서 김 교수가 "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고생스럽기는 해도 후계자가 정착할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그럴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김 교수의 팔을 붙들고 강연장으로 들어 갔다.
강연을 끝내고 가가운 곳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내가 다시 한번 "E총장이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놀렸더니 "E총장은 기억에 없는데 그때
김 교수님이 오셨던 생각은 난다"고 김 교수가 말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E총장은 김 교수를 보러 갔는데,
김 교수는 나만 기억한다고 말하는 걸 ㅂㅗ니, 그때는 김 교수가 E총장보다 나를
더 생각한 것아니었을까. 혼자 웃었다.
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일보 土日섹션 Why? 2018년 4월7일(토)-8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