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한 광고는 그만하오"
"창피한 광고는 그만하오"
"본인이 신임 김화군수 기ㅁ갑순씨와 동거 6년인 바, 근자에 김씨가공주 본향(本鄕)에 첩을 얻은 후 본인에게 향한
마음이 갈수록 멀어지는지라, 젊지도 늙지도 않은 신세로 김씨를 의탁할 길 없기로 지금 이후 김씨를 영위 거절하고
타인에게 의탁하여 남은 세월은 온당히 지내고자 하오니 친지들은 그리아소서. 북서 벽동 최소사 고백."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9일자에 실린 광고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갑순은 공주 감영(監營)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벼슬을 사서 6개군 군수를 지낸 소문난 탐관오리였다. 한때 대전 땅의 40%가 그의 소유였다.
그런 인물의 아내가 신문에 광고를 내 남편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이혼을 통보한 것이다.
구한말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자주 실렸다. "본인의 여아 한순이와 그 모가 음력 7월1일 밤 도망하였으니
찾아주면 후사하겠다" 같은 심인(尋人)광고도 많았지만, "내 아들의 성질이 불량하여 논밭을 몰래 팔아먹었으니
이는 무효"라는 내용도 있었다. "본인의 집사람 김진옥이 본인을 속이고 몰래 도망하였으니 친지나 마름은
절대 상대 말고 무시하옵"하는 광고도 있었다. 남들이 알면 창피한 집안 사정까지 그대로 공개했다.
반면 외국인의 고아고는 상품선전 위주였다. 1896년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조선신보'에는 아사히 맥주와
포도주 광고기 실렸고, 1900년대에는 기계류 치약 약품 등이 광고에 등장했다. 당시 시장은 수입산 면제품, 석유,
염색약, 담배, 술, 안경 등이 석권했다. 거리에 까만 수입 선글라스를 끼고 안경,
수저 등을 파는 장수<사진>('꼬레아 에 꼬레아니'서 인용)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 결과 광고면 한쪽에는 한국인의 '창피스러운 광고'가, 다른 쪽에는 '외국 상품 광고'가 나란히 실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성(皇城)신문 1900년 10월2일자를 보면, 2단 오른쪽편에 "친척이 나의 논을 사기매매하려 하니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매수치 말라"는 한국인 광고가 있고, 그 왼편에는 일본에서 생산된
'할로(HALLO)담배' 광고가 실려 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20세기 초 신문광고에 대한 비판론이 대두했다.
1909년 9월 4일자 황성신문은 한국인의 과오형태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아들이나 동생이 나쁜 놈이라는 광고가 매일 여러 건씩 실리는데, 그런 인간이 되도록 방치한 책임은 오히려
자신에게 있다. 설령 부랑 잡배라 할지라도 정을 쏟아 권하고 학문에 종사토록 하여 착한 사람을 만들어야
하거늘, 그 악행을 광고를 통해 세상의 널리 퍼뜨리니 부모가 아들의 잘못을 오히려 조장할 따름이다."
신문광고 비판론은 두 가지 논거를 내세웠다. 하나는 외국상품의 침투를 촉진하여 조선 경제를 파탄시킨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자주독립을 외치는 신문들이 외국상품의 광고수입으로 운영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경제적 속령화(屬領化)와 신문의 도덕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런 논란을 거쳐 100년 전 조상들은
'시장경제'를 배워나갔다.(정진석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정보학)
2009년 9월10일 (A34)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