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인

월북 했지만, 평생 반북을 외쳤던 천재 작곡가

중전마님 2021. 5. 31. 16:04

1960년 유배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타에서 연주하는 작곡가 정추

親北 작곡가 윤이상과 정반대 삶 살았던 정추

越北 했지만, 평생 反北을 외쳤던 천재 작곡가

지난 13일 카자흐스탄 알마타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천재 작곡가' 정추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같은 한국 출신 음악가지만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죽을 때가지 북한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윤이상과 그의 삶이 극명히 비교되기 때문이다. 192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정추는 유년시절을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외삼촌(정석호) 집에서 지냈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외삼촌을 베를린 음대에 유학 보낼 정도로 정추의 외가는 부잣집이었다. 첫 작곡은 일곱 살 때였다. 동네 축구단 단가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을 만든 동요 작곡가 정근은 그의 친동생이다. 정추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초대 서기장을 지낸 형(정춘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46년 월북한 것도 형의 권유 때문이었다. 평양 음대 교수를 지내며 형이 제작한 북한 선전영화의 음악을 만들었지만, 곧 북한의 현실에 실망했다. 생전에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북한이 한다는 짓이 비과학적인 데다,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것 같았다"고 했다. 정추에게 1952년 소련 차이콥스키 음대 유학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모스크바서 反 김일성 운동北에 쫓기다  소련으로 망명

"가짜 사회주의 찬양한 윤이상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라"

하지만 탁월한 실력으로 '차이콥스키의 4대 직계 제자' 란 별명을 얻었고, 졸업 작품 '조국' 은 개교 이래 첫 만점을 받았다. 정추는 1957년 10월17일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다. 소련의 북한 유학생들을 규합해 모스크바대 광장에서 '김일성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외치며 김일성 우상화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운동에 힘입어 북한 내에서 반(反) 김일성 움직임이 한창일 때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반대 세력 제압에 성공했고 정추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다행히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나쁠 때였다. 소련은 정추를 송환해 달라는 북한의 요청을 거부하고 알마티(카자흐스탄)로 보냈다. 정추는 유배지에서 음악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련 당국이 1961년 성대하게 개최한 '가가린(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사) 쾌거 축하 공연'에서 연주된 '뗏목의 노래'가 그의 작품이다. 카자흐스탄 국립 여성 사범대학과 알마티 음악대학의 교수도 지냈다.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은 50곡이 넘는다. 1988년 카자르스탄 정부는 그에게 '공훈 예술인'칭호를 부여했다. 정추는 1992년 남로당의 마지막 총책인 박갑동(1957년 탈북)과 함께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구국전선)을 결성했다. 정부 소식통은 "세계6개국에 지부를 둔 구국전선은 해외의 반북 인사를 발굴하고 북한의 인권 탄압 실상을 폭로해왔다."고 했다. 2011년 방한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 내에서 종북,친북 인물들이 나타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그렇게 북한이 좋다면 북쪽으로 보내서 우상화각 뭔지, 인권이 없는 세상이 어떤지 직접 보고 오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했다.

일각에선 그를 '카자흐스탄의 윤이상' 으로 부르기도 했다. 둘 다 천재적 작곡자이자 망명객이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추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난 북한 체제를 반대한 망명자고 윤이상은 남한 체제를 반대하고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이라며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북한군 장교 출신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김씨 일가 우상화의 나팔수 역할을 한 윤이상이 한국에서 존경을 받고 정추 선생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했다.(이용수 기자)

조선일보2013년6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