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를 위해 이불, 옷까지......전당포와 함께한 서민들
끼니를 위해 이불, 옷까지....전당포와 함께한 서민들
"5원만 줍시오!" "그렇게는 못 줍니다" "그전에도 5원은 받아갔는데요" "그래도 지금은 안 됩니다" '니켈시계 한 개를 꺼내 들고선 얼굴이 핼쓱한 청년 하나가 뚱뚱보 배때기 전당포 주인 앞에서 한참 동안을 졸라대고 있다. 그래도 주인은 묵묵히 앉아 있다. 그러나 돌연 "그럼 4원50전 만 가져갑쇼" 하고 선심이나 쓰는 듯 말을 꺼낸다. 사나이는 힘없는 어조로 "그럼 줍시오" 하고 시계를 섭섭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바치고 간다.' 조선일보 1932년 12월23일자 '세모풍경 ㅡ전당(典當) 문전 애걸군(哀乞群)' 기사의 한 대목이다. 물건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는일제 치하 도시 영세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금융기관' 이었다. 그러나 1월늘 빌리면 월 이자가 7전, 그러나까 월 이율이 7%나되는 고리대금이었다. 조선일보는 "전당포를 조선인 경제기관으로 소개하게 됨은 자타가 공히 부끄러워할 일이지마는 이 엄연한 사실을 거부할 수 없는 바...."(1933년 4월28일자)라고 한탄했지만 은행 문턱은 높기만 했으니 쌀독이 빈 영세민들은 미우나고우나 전덩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 영세민들은 무시로 전당포를 들락거려야 했다. 시계나 양복을 맡기는 사람은 여유있는 축에 속했다. 끼니가 떨어지면 아이를 둘러업은 아낙네들이 낡은 옷가지나 이불 보따리를 들고 전당포로 무거운 벌걸음을 옮기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한때의 식량과 하루 저녁의 시탄(柴炭)이나 될까 하고 혹은 입었던 주위(周衣)를 벗어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고 혹은 남비-식기 등 생활도구를 가지고 와서 삼십전 내지 오륙십전의 약소한 돈을 꿔가는 사람이 적지않아 추워짐에 따라 빈궁에 우는 사람들은 나날이 그 수효가 늘어갈 뿐"이라고 조선일보는 우려했다.(1929년11월27일자) 전당포의 높은 이자를 감당 못해 맡긴 물건을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원성이 전당포에 쌓여가는 물건 높이만큼 높아갔다. 경성부가 1929년 12월 효제동에 이자를 대폭 낮춘 동설 전당포 한 곳을 개설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반면 사설 전당포는 날로 번창했다. 1930년 186곳이었던 경성의 전당포 숫자는 1932년 230곳으로 증가했다. 1933년 2월10일자 조선일보는 '전당(典當)안코 못사는 경성부민' 제목의 기사에서 "전당포의 작년 9월 입질(入質. 돈을 빌리기 위해 담보로 물건을 맡기는 것)한 구수(口數:건수)가 45만 286구로 그전 해보다 6만5000구가 늘었다"며 "생활난이 전당포 이용을 더 많이 하게 하는 것이니 세민(영세민) 계급의 고통의 일면을 였볼 수 있다"고 식민지 조선인들의 피폐한 삶을 전했다.
(최장원 디지틀 뉴스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