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랑이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구먼"
"김 선생은 잘못을 저지르고 부인한테 사과한 적이 없소?"
A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있기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처가는 아빈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를 먼저 해야 A교수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옛날얘기를 했다.
1960년대 초에 내가 미국에 가 머물고 있을 때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환' 화를 '원'화로 바꾸면서 옛날 돈을 모두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그때 한국에 있던 아내는 내가 몰래 숨겨둔 돈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큰 딸과 아들에게 "너희들 나와 함께 아버지 서재에 올라가 책갈피를 들춰보자"고 했다.
책 케이스 속에서 지폐 뭉치를 찾아냈다.
미국에 있는 내게는 "귀국하면 가족회의를 열어 따져보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고만 했을 뿐 그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하루는 아내가 발설하고 애들이 합세해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너희들도 이다음에 나 같은 처지를 당해보라. 내 친구교수들은 사모님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게 보통이란다.
그래도 나는 책 케이스에 넣어 두었으니 정직한 편이다" 말하고는 용서를 받았다.
내 얘기를 들은 A교수는 "그 당시에야 누구나 다 그랬는 걸, 큰 잘못이 아니지"라면서 웃었다.
그의 얘기는 내용이 좀 달랐다.
어디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부자간이나 형제 사이는 혈연관계입니다.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피로 맺어진 하나의 민족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더라도 공동체 운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다.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여러분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싸우거나 이혼을 하면
그 후 부터는 남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피는 물과 다르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었다.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 A교수의 부인과 가까운 지인이었다. 그날 강연 내용을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이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까지 과장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A교수의 부인이 "그래, 우리는 헤어지지만
하면 그뿐이지요? 몇십 년의 애정은 아무것도 아니고요" 라고 따져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물었더니 "내가 잘못했다고 했지요,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거든요"라면서 멋쩍어 했다.
A 교수의 성격과 표정으로 보아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되나, 나 같으면 '당신은 사랑이 피보다도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 하고 응수했겠다" 고
했더니, A 교수도 "아차, 그걸 내가 몰랐구나"라면서 아쉬워했다.
오늘은 강원도 양구에 갔다가 A교수의 무덤 앞에 서서 그 지나간 얘기를 되살려 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정말 좋은 친구 였는데.
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일보 土日섹션 Why? 2018년 9월 8일(토)- 9월 9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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