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물건의 추억 51

삼시 세끼 밥 짓는 연기 솟던 굴뚝 이웃 형편 짐작하는 통로 되기도

삼시 세끼 밥 짓는 연기 솟던 굴뚝 이웃 형편 짐작하는 통로 되기도 1991년 어버이 날, 경남 울산의 어느 노부부가 39년간 아궁이에 매일 나무를 때고 있는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6.25 때 잃어버린 네 살 아들이 혹시나 살던 동네를 기억하고 돌아올까 싶어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온 것이었다. 집 잃은 아들에게 보내는 어버이의 봉화(봉화) 같은 굴뚝연기가 많은 이들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가정집 굴뚝은 오랜 세월 우리들에게 '연기 배출 통로'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추녀 밑 야트막한 굴뚝에서 삼시 세끼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연기는 집안 사정을 담장 바깥으로 알리는 신호였다. 바티칸 교황청의 콘클라베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 후 시스티나 성당 굴둑에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교황 선출을 알리듯, 어느 집..

성탄카드, 공무원들 금지목록 1호 50년대 카드엔 '춘향이 러브신'도

성탄카드, 공무원들 금지목록 1호 50년대 카드엔 '춘향이 러브신'도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 교환을 금한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연말을 맞아 전 공무원에게 내린 '허래허식금지 훈령' 4항 중 첫 번째다. 이 엄포가 통했는지 그해 12월20일부터 23일 까지 우체국 이 췩급한 카드는 전년도의 절반도 안되는 14만 2829통이었다. 이보다 앞서 1960년 4.19혁명 후 출범한 장면 정부도 '공무원들은 누구에게도 성탄카드 - 연하장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허리띠 졸라매던 시절엔 크리스마스카드도 사치와 낭비의 대표적 사례로 지탄받았다. 1949년 12월, 체신부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국민의 신앙 정신을 드높이고자' 최초로 관제(관제) 크리스마스카드 2종을 내놓았을때만 해도..

달력, 한때는 년5000만부 시장 1공화국 땐 '일본제' 수입에 철퇴

달력, 한때는 년 5000만부 시장 1공화국 땐 '일본제' 수입에 철퇴 1958년 1월 국내에 1800부가 반입된 외국 인쇄물에 대해 치안국이 전량 압수 조치를 하고 수입 업자를 소환 조사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일본제 달력이었다. 내용이 외설적이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정절(전정절 : 일왕 생일)' '기원절(기원절: 일본건국기념일)' 등 일본 명절리 표시된 일본 달력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당국은 '일본인용 카렌다를 우리국민 손에 들어가게 했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 이라며 이를 수입한 회사를 '국가관이 미약하다' 고 비난했다. 중대 사건 때처럼 신문엔 속보가 이어졌다.(조선일보 1958년 2월 5일자) 1958년 초 도쿄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일본 측이 우리 ..

볼 사람은 다 봤던 플레이보이지 암거래상들, 간첩접선하듯 거래

볼 사람은 다 봤던 플레이보이 지 암거래상들, 간첩 접선하듯 거래 "PB 15, PH 20개 가능한가요" 낮 1시 청량리 맘모스호텔 앞에서 헤드폰을 귀에 꽂은 채 서 있으시오." 1983년 1월 검거된 국내 최대 음란서적 판매책이 중간 상인들과 나눈 교신 내용이다. 'PB' 는 '플레이보이'지, 'PH'SMS '펜트하우스' 지를 뜻하는 은어다. 당시 언론은 "마치 반공(反共) 드라마에 나오는 북괴 간첩들 접선 모습 비슷하다"고 했다. 수십만권을 밀매한 범인의 창고에선 4t 트럭 2대 분량의 '빨간책'이 압수됐다. 1990년엔 주한 미군 관련시설 창고에 있던 플레이보이' 등 성인용 책 23만5천권을 몰래 팔아온 사람들이 붙잡히기도 했다. 광복 70년간 플레이보이 잡지만큼 오랜 세월 '지하' 에서 대량 유통..

"졸업 앨범, 신붓감 발탁 자료 된다"

"졸업 앨범, 신붓감 발탁 자료 된다" 일부 여대생 수백만원 들여 촬영 1988년 겨울, 여고생들을 일본 술집 접대부로 팔아넘기다가 구속된 인신매매 조직이 '대상자' 를 물색한 방법이 기발했다. 범인들이 뒤진 건 서울, 경기 지역 7개 여고의 졸업 앨범이었다. '사진 면접'을 통해 얼굴이 예쁜 450여명을 골라낸 뒤 "아르바이트하며 일본 유학할 수 있다"는 편지로 미끼를 던졌다.(조선일보1988년 12월17일자) 학창시절 추억을 간직하려고 만든 옛 졸업 앨범들을 너무 많은 외부인이 엉뚱한 목적으로 '이용'했다. 앨범에 실린 전교생 연락처를 전화 마케팅에 쓰려는 사람들은 졸업식장이나 인쇄소에까지 사람을 보내 졸업 앨범을 사들였다. 특히 많은 시선을 받은 건 여대 졸업 앨범이었다. 1970년대 일부 기업 경..

'3대 월동 필수품'이었던 털신

2015년 11월25일 (수요일) 조선일보 '3대 越冬 필수품' 이었던 털신 오늘엔 어르신, 스님용으로 명맥 40-50년 전 신문들은 11월이면 한 번쯤 월동 준비 안내 기사를 실었다. 그때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 김장, 겨울옷과 함께 꼭 꼽았던 물건이 있다. '털신'이다. '아이들이 1년 사이에 발이 자라 털신이 혹시 작아지지는 않았는지 꼭 점검할 것' 을 권했다. 그만큼 이 신발은 1970년대까지 우리 모두의 '국민신발' 이었다. 요즘 갖가지 디자인으로 나오는 '털부츠'가 아니다. 고무신을 닮은 검정 신발에, 발목 부분에 갈색털을 덧댄 옛날 털신이었다. 찬바람 불 대 노부모를 찾아뵙던 자녀가 사들고 가는 선물이나, 아이들이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의 목록에서도 이 신발이 상위권이었다..

상투적 표현 가득'국군 위문편지' 초등생들 '명복을 빕니다'쓰기도

상투적 표현 가득 '국군 위문편지' 초등생들 '명복을 빕니다' 쓰기도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 현장의 한국군 앞으로 도착한 고국의 선물 구러미에선 가끔 김치 포장이 터져 엉망이 됐다. 김치 냄새에 익숙지 못한 미군들이 마스크를 스고 법석을 떨면서도 시뻘건 국물로 범벅 된 상자 안에서 꼭 골라냈던 귀한 '서류' 가 있었다. 위문편지였다. 파월 용사대부분은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매일 오후 4시쯤을 가장 즐거운 시간으로 꼽았다. 제법 숫녀티가 나는 여고생의 예쁜 글씨에 가슴 설레기도 했다(조선일보 1966년 2월17일자). 학생들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 는 1950년대에 시작됐다. 편지가 인연이 되어 병사와 여학생이 결혼까지 하는 일은 6.25 때부터 있었다. 1960년대엔 찬 바람이 불면 교육청별로 편..

등장 초기엔 배척받던 교련복 '겁없는 청년' 대표 패션 되기도

등장 초기엔 배척 받던 교련복 '겁없는 청년' 대표 패션 되기도 1979년 2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28세 무직 청년이 '국회의원의 아들이며 의대생' 이라고 속이며 여러 여대생을 농락하다가 잡혔다. 그가대학생을 사칭하려고 동원한 소품은 학생증도 교복도 아니었다. 교련복이었다. 딱딱한 인상의 교복보다 편안한 교련복을 즐겨 입던 대학생 패션을 흉내 낸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등장한 유니폼 중 교련복처럼 여러 이미지가 복잡하게 겹쳐진 옷도 드물듯하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고교, 대학교 교련 교육이 시작될 때 등장한 교련복은 거부의 대상이었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1.21 사태가 터지자 이에 대응해 마련했다는 학생 군사훈련이었지만, 대학생들은 '학원의 병영화'라..

'한 질 1000만원' 외국 백과사전 술집, 양복점 장식용으로 구입

'한 질 1000만원' 외국 백과사전 술집, 양복점도 장식용으로 구입 "해외 백과사전들이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 1971년 조선일보가 외국 백과사전들의 수입증가 실태를 꼬집었다. 1971년 조선일보가 외국 백과사전들의 수입 증가 실태를 꼬집었다. 당시 북한 무장공비나 마약 사건에나 쓰던 '침투'라는 표현까지 썼다.(1971년4월13일자) 부유층들 사이에 이 값비싼 수십 권짜리 외국책 세트를 구입하는 일이 급증하자, "귀한 달러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 것, 영문서적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허영심과 과시욕을 채우려고 거실에 꽂아 놓고 있다면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외국 백과사전은 값이 엄청났다. '브리태니커(Britannica)' 는 4가지 등급의 장정으로 만들어 판매했는데,..

동네마다 나붙던 '대통령 담화문' 함부로 찢었다간 유치장 신세

동네마다 나붙던 '대통령 담화문' 함부로 찢었다간 유치장 신세 1975년 1월27일 어느 지방 도시 주민이 벽보 한장을 찢었다가 경찰에 붙잡혀 5일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훼손한 벽보가 '유신헌법 찬반 투표에 즈음한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목길 담벼락에까지 종종 나붙었던 대통령 담화문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엄중한 물건이었다. 1960-70년대 국가적 이슈에 관한 대통령 담화문은 대형 벽보로 10만장 안팎씩 찍어전국 읍,면,동 골목길 담벼락에까지 밀가루 풀로 붙였다. 권위주의적 정권 시절 대통령 담화문이란 국민과의 수평적 소통이라기보다는 엄부(엄부)의 훈계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았다. 민심은 그릇되게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한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의 제목은 '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