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다 나붙던 '대통령 담화문' 함부로 찢었다간 유치장 신세
1975년 1월27일 어느 지방 도시 주민이 벽보 한장을 찢었다가 경찰에 붙잡혀 5일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훼손한 벽보가 '유신헌법 찬반 투표에 즈음한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목길 담벼락에까지 종종 나붙었던 대통령 담화문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엄중한 물건이었다. 1960-70년대 국가적 이슈에 관한 대통령 담화문은 대형 벽보로 10만장 안팎씩 찍어전국 읍,면,동 골목길 담벼락에까지 밀가루 풀로 붙였다. 권위주의적 정권 시절 대통령 담화문이란 국민과의 수평적 소통이라기보다는 엄부(엄부)의 훈계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았다. 민심은 그릇되게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한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의 제목은 '반동적 언론을삼가라/ 리 대통령 각하 담화문'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문에는 한자어 투가 많았다. 1963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어린이날 담화문' 에서도 "어린이헌장과는 거리가 먼 일이 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엄중 처단해야 될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부산 '효주양 유괴 사건' 때도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최근 곽경택 감독 영화 '극비수사'의 소재가 된 바로 그 사건이다. 효주양이 1979년 4월1일 두 번째 유괴된 뒤 수사가 실마리도 못 찾자 박 대통령은 4월18일 오전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만일 범인이 지금이라도 지난날을 뉘우치고 어린이를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나는 관계기관으로 하여금 이 사람의 죄과를 가능한 한 관대히 다루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국가 원수가 어린이 유괴 사건에 관해 담화를 발표한 건 처음이었다. 효주양은 담화문이 발표된 후 곡 12시간 만에 길가에 버려져 부모 품에 안겼다(조선일보1979년4월19일자). "효주는 대통령 담화 덕분에 돌아왔다"는 말이 나왔다. 박 대통령의 담화문은 이보다 앞서 1968년1월 충무공 '난중일기' 도난 사건 때도 있었다. 이때도 범인의 자수를 촉구한 대통령 담화문 발표 직후 신기하게도 범인이 검거됐다. 나붙는 순간 약간 긴장하며 벽보 앞으로 모여들게 했던 '대통령담화문' 벽보는 민주화와 함께 슬며시 사라졌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지난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0돌을 앞두고 불만을 가진 주민들이 당에서 부착한 벽보를 훼손하는 일이 잇다르자 김정은 제1위원장이 범인들을 엄벌하라고 지시했고 한다. 우리는 정부, 국민 간에도 신문 방송 이메일 SNS등 다양한 소통을 하고 있는데 북한은 아직도 '담벼락 커뮤니케이션' 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조선일보
2015년 10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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