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눈물 가득 뱄던 '슈사인 박스'
거리의 직업소년들 재산목록 1호
1969년 어머니 날인 5월8일, 서울 용산 경찰서 뒤뜰에 직업 청소년들이 가득 모였다. 38세의 어느 여성이 바느질 품삯으로 번 돈 23만원(오늘의 약 1300만원)을 털어 구두닦이통 2000개를 소년들에게 기증한다는 행사가 열린 것, 흐뭇한 미담처럼 보였지만, 신문들 보도가 엇갈렸다. 두 신문은 '불우한 소년들이 꿋꿋이 살아가라고 격려한 한 어머니의 따듯한 선물' 로 소개했지만 또 다른 신문의 기사는 정반대였다. "여인이 구두통을 대량으로 제작해 팔려다 여의치 않자 경찰 쪽에 판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경찰이 엉뚱하게도 '억지 기증식' 을 꾸몄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일을 보도하지않았다. 자발적 기증인지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무렵 직업 전선에 뛰어든 청소년들에게 '슈사인 박스(구두닦이통)' 만큼 중요한 물건도 드물었다는 점이다. 조그만 집 모양으로 짜맟춘 깅이 30cm 안팎의 나무통, 전쟁의 폐허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던 1950년대에 빡빡머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거리로 나선 소년들에게 이 통은 '재산목록 1호' 같았다. 당시 경찰서나 청소년 보호 단체가 직업 청소년들에게 흔히 줬던 선물이 슈샤인 박스와 운동화였다. 1965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직업소년 중 60%인 8084명이 구두를 닦고 있었다. 슈샤인 보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린이 주간이면 구두 닦는 소년들만 따로 모아 창경원에서 위안회를 열었다. 이들에게 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슈샤인보이 학교도 1953년 생겼다. 서울 남산에 있던 이 학교를 방문한 미국 사회사업가는 학생들이 방문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수업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고 썼다.(조선일보 1955년 11월 22일자) 슈샤인 박스는 구두약 등을 담는 보관통이자, 손님이 구둣발을 올려 놓응 발판이었다. 소년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두를 닦았다. 이런 자세에 대해서는 1965년 외국에서도 문제가 됐다. 레바논 내무장관은 "구두 닦는 사람들의 품위를 지켜 주기 위해 손님은 구두를 벗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상당수 슈샤인 보이들조차:품위 찾다가 끼니 굶겠다"며 닦는 자세 운운은 배부른 소리라고 한탄했다.
이제 주저앉아 구두 닦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미화원들이 구두를 받아다 가게에서 닦는 요즘, 슈샤인 박스도 구경하기 어렵다. 전쟁통에 구두통을 메고 식구를 먹여살렸던 82세의 전직공무원은 60년간 소중히 간직해 오던 구두통을 최근 대한만국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땀과 눈물 가득 밴 슈사인 박스는 고단했던 시대를 상기시켜 주는 유물이 되었다.(김명환 사료연구실장).
2015년10월28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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