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호 29

첫 해외파병, 1964년 베트남

첫 해외파병, 1964년 베트남 1964년 9월11일 제1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태권도 교관단 등 국군 장병 140명이 탄 해군 상륙함(LST)이 부산항을 출항, 베트남으로 향했다. 건군 이후 16년 만에 이뤄진 첫해외파병의 순간이었다. 1965년 3월에는 한국 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이 베트남에 추가 파병됐는데, 서울운동장에서 환송 행사가 열렸다. 국회에서 전투부대의 베트남 추가 파병 동의안이 통과됨에 따라 1965년 10월엔 해병대 청룡부대가 첫 해외파병 전투부대의 주역이 됐다. 이후 육군 맹호, 백마부대 등이 차례로 파변돼 12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연인원 31만2853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 기간 중대부대 작전 1174회, 소부대 작전 57만 6302회 등 57만7476회의 작전을 펴 실전..

북한 대남간첩 남파는 1968년 절정

북한 대남간첩 남파는 1968년 절정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끊임없이무장. 비무장 간첩을 내려보냈다. 이들은 남한 내 좌익 세력들과 결탁, 민.관 이간, 특정 인물. 정당에 대한 모략선전, 국내 지식인을 접촉해 '평화통일론' 을 주장하고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혁신계 용공분자를 포섭, 사회혼란을 야기하도록 유도했다. 휴전 이후 간첩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은 1968년이다. 북한 연구소가 펴낸 '북괴도발 30년'에 따르면 이 해 생포된 간첩은 62명, 사살된 간첩은 319명이었다. 김신조 등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침투한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이 일어난 해가 1968년이며,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3일까지는 3차례에 걸쳐 15명을 1개조로 하는 북한 124군 부대 무장간첩 8..

1984년 3월 대원외고, 대일외고

1984년 3월 대원외고, 대일외고 1984년 3월 서울 중곡동 대원외국어학교(현 대원외고)에 신입생 720명이 입학했다. 당시 대원외국어학교는 지금처럼 특수목적고가 아닌 '각종학교'로 대안(대안) 학교 성격을 띠었다. 영어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이 입학했으며, 교육과정이 일반계 고교부다 자유로웠다. 대원외고 1기 A씨는 "좋은 대학 가려는 목적보다 단순히 외국어에 미쳐서 입학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성적우수 학생들이 입학하는 지금에 비해 초기 외고는 '어학 영재 양성' 이라는 설립취지에 맞게 운영된 측면이 있었다. 1기 신입생을 뽑던 선발고사에선 영어지필 시험만을 봤으며, 이후 국어, 수학 등이 선발고사에 추가됐다. 대원외고 1기로 입학한 B씨는 "오로지 영어 실력만을 보니 영어를 좋아하는 친구..

첫 필화, 1955년 매일신문 최석채

첫 필화, 1955년 매일신문 최석채 1955년 9월14일 오후, 대구매일신문사에 곤봉과 망치를 든 괴한 20여명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인쇄 시설과 집기를 때려부쉈다. 만루하던 직원들도 곤봉과 주먹 세례를 받았다. 이날 밤 삐라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신문사를 '이적단체'로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단체와 의가'로 규정하는 성명서였다. 우익단체 국민회 간부와 청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이 신문사에 몰려간 것은 잔날 최석채주필이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때문이었다. 대구에 오는 고위층을 환영하기 위해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한 내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측근인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는 날, 무더위 속에 학생들을 동원한 것을 빗댄 사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1968년 '고속도로시대' 열다

박정희 대통령, 1968년 '고속도로시대' 열다 "이 도로야말로 인간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경전으로써 이루어진 공사요, 우리나라의 도로 시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70년 7월7일 대구, 박정희 대통령은 감동에 들뜬 목소리로 대한민국 도로 혁명의 새 시작을 알렸다. 총 연장 428Km(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Km), 305개(현재는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오른쪽 사진) 전 구간이 개통됐던 것이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삼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km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면 감회에 젖었다. 1905년 울사늑약 이후 우리나라에는..

사시 첫 여성 합격자 1951년 이태영

사시 첫 여성 합격자 1951년 이태영 지난 16일 행정안전부는 올해 행정고시 2차 합격자 29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들은 오는 11월14-15일 면접시험 후 최종 합격자가 가려진다. 면접에서는 통상 10-20%가 탈락한다. 간부 공무원을 선발하는 고시제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8월 12일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됐다. 그땐 고등고시라 불렀다. 같은 해 11월 처음 치러진 고등고시에는 행정과, 사법과 등 2개 과가 있었다. 행정과는 현 행정고시, 사법과는 현 사법시험의 전신이다. 첫 고등고시 행정과엔 502명이 지원해 3공화국 시절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고 김학렬씨 등 5명이 합격했다. 첫 사법과엔 625명이 지원해 법제처장을 역임한 고 김도창씨등 16명이 합격했다. 1953..

해군 1호 전투함은 1950년 도입 백두산함

해군 1호 전투함은 1950년 도입 백두산함 1948년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우리 해군에는 변변한 전투함 한 척 없었다. 1946년부터 1년여의 건조 끝에 진수한 첫 300t급 국산 처계정 '충무공정' 등 소형함정과 미국에서 도입한 상륙정, 소해정이 고작이었다. 전투함 확보를 갈망하던 해군은 1949년 6월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까지 전투함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해군은 모금액 1만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국고에서 지원한 4만5000천달러를 합친 6만달러로 미국에서 '백두산함'(pc-701. 사진)을 인수했다. 2차대전 때 사용했덩 미 연인 초계정에 구경 76mm 함포를 장착한 백두산함은 길이 52.9m, 배수량 450t에 40mmvh 1문, 20mm포 5문을 갖추고 있..

기록상 1949년, 살인범에 첫 사형 집행

기록상 1949년, 살인범에 첫 사형 집행 "사형(死刑)이 우리의 문화수준이나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보아 지금 곧 이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대한 위헌 심판 사건에서 합헌(合憲) 결정을 내리면서 이렇게 판시했다. 헌재가 시형제에 관해 내린 유일한 결론이다. 그러나 2007년 국제사면위원회는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 국가'로 지정했다. 김영삼 정부 막바지였던 1997년 12월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한 뒤, 12년 가가이 단 한건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미집행 사형수'는 60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중엔 1993년 11월 말부터 15년11개월을 복역한 사람도 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올 7월31일 형확정)이 60번째를 채..

의원 제명1호 김영삼...79년 釜馬항쟁 촉발

의원 제명1호 ....79년 釜馬항쟁 촉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 제명된 1호 국회의원은 1979년 10월4일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첫 제명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경우다. 발단은 제1야당 당수였던 김 의원의 뉴욕타임스 인터뷰였다. 그는 이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팔레비왕정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던 사태를 언급,"이는(팔레비왕정을 지지했던)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미국대사관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고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YS가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이탈했고, 반국가적 언동을 했다"며 의원직 제명안을 제출했다. 여권은 야당측이 제명안 의결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자 의원총회장으로 자주 사용..

최초의 베스트셀러, 정비석의 자유부인

최초의 베스트셀러, 정비석의 자유부인 "2차 모임은 댄스 파티인데 남편은 안 되고 애인 데려오세요. " 대학 교수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던 오선영은 어느 날 동창을 통해 명사 부인 모임에 끼게 되고, 그곳에서 자유로운 삶을 즐기는 여성들을 만난다. 남편을 졸라 양품점에서 일하게 된 선영은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하지만, 남편의 아량과 이해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정비석(1911-1991)이 1954년 발표한 소설 '자유부인'은 14만부쯤 팔려 우리나라 출판사상 처음으로 10만부를 넘긴, 명실상부한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같은 해 1월1일부터 8월6일까지 서울신문에 215회에 걸쳐 연재됐고, 연재 완료와 동시에 정음사에서 단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