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엽서- 대한민국60년 23

하룻밤에 열 권...'速讀神功'(속독신공) 을 배운 책

하룻밤에 열 권...'速讀神功(속독신공)' 을 배운 책 1961년에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은 최인훈의 '광장' 과 무협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김광주의 '정협지' 였다. 그 해 늦은 봄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역사의 방향과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두 불안하고 막연하던 시절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자유를 찾아 북한과 남한을 거쳐 제3국을 찾아 나섰다면, '정협지' 독자들은 강호의 고수들이 펼치는 절대무공의 세계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1961년 6월15일부터 1963년 11월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정협지' 는 대만 작가 웨이츠원(웨이츠원)의 '검해고흥(검해고흥)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가져와 사실상 새롭게 쓰다시피 한 작품이다. 회양방과 숭앙파라는 두 무림방파의 대립을 배경으로 절대무공을..

'깡통 분유' '악수표 밀가루' 의 추억 <28> 구호물자

' 깡통 분유' '악수표 밀가루'의 추억 "전쟁 뒤 구호물자로 우유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유와 물엿을 섞어 만든 비가가 나노자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 군것질을 지배했다." 답사여행 때 반드시 밀크캐러멜을 챙겨 먹는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회고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미국이 우리나라에 제공한 구호물자의 역사는 광복 직후 점령지 행정구호 원조로 시작됐다. 6.25전쟁 기간과 그 이후로는 한국민간구호게획(CRIK), 유엔한국재건단(UNKRA), 국제협조처(ICA), 공법(PL)480 등에 따른 원조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 우리나라가 받은 원조는 24억 달러가 넘었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공법480에 따라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 제공된 구호물자다. 정식명칭은 미국 공법480호..

'0의 사이렌'이 울리면 술꾼과 연인들은.....

'0시의 사이렌' 이 울리면 술꾼과 연인들은...... '세상 많이 좋아졌어. 앞으로는 곱쟁이로 살게 됐으니 말여. 그동안은 말로만 하루 이십사 시간이었지. 우리가 실지로 쓴 시간은 하루 스무 시간밖에 더 됐나. 그것도 숫적으로 스무 시간이지 게서 잠잔 시간을 제해 봐..." 이 문구의 '산 넘어 남촌' 에서 노름꾼 심씨는 늘 통금에 쫓겨 끗발오를 만하면 아쉽게 일어서야 했던 터라,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대한 소감이 남다르다. 옆에서 거드는 한 마디. "그렇구먼그려. 전반 삼십여 년은 일제에 묶이고 후반 삼십여 년은 일제에 묶이고 후반 삼십여 년은 통금에 묶어 반만 살았으니, 늙바탕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온새미로 살아야 하고말구." 1945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1호에 따라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서울..

"입대 영장 나왔다, 돌아와라 광수야"

심인(尋人) 광고 "입대 영장 나왔다, 돌아와라 광수야" 심인(尋人)은 '사람을 찾음' 또는 '찾는 사람' 을 뜻한다. 1992년 당시 총무처 발행 '행정용어 순화편람'에 따르면 심인(尋人)은 '사람 찾음'으로 바꿔써야 한단다. 총무처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이제는 심인이라는 말이 낯설다. 사람 찾기 위해 신문에 내는 심인광고도 '사람 찾기 광고'로 바꿔 써야 할까 보다. 심인광고의 뜻은 이승우의 소설 '심인광고'가 잘 말해준다. "치매 증세를 앓고 있는 노인이거나 놀이공원에서 길을 어린이거나 신병, 또는 생활고를 비관하여 집을 나간 주부이거나 집이 싫다고 뛰쳐나간 청소년이거나 제각각의 내력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몇 가지 유형으로 대강 뭉뚱그리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이고 사연과 내막은 ..

수많은 '중삐리' '고삐리'의 로망

이소룡 수많은 '중삐리' '고삐리' 의 로망 이 땅에 이소령 열풍이 몰아친 것은 영화 '정무문'이 국내 개봉된 1972년부터다. 쉬는 시간에 한명이 "아비요오--" 소리 지르며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튕겨주면, 재빨리 다른 아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악역의 무리가 된다. 가방에 쌍절곤 넣고 다니는 친구가 한 반에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시절, 마당이나 옥상 한 쪽에 샌드백이 걸려있고 붕대를 감은 아령이 놓여 있었던 그 시절 이소룡은 대한민국 사내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이소룡 영화는 1971년 부터 1973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는 그가 생전에 완성한 영화이다. 아쉽게도 다섯 번째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는 도중 33세 나이로 돌연 사망했다. 몇 편 안 되는 영화를..

'야전' 하나에 야유회 춤판은 무르익고....

야외전축 '야전' 하나에 야유회 춤판은 무르익고... "고1 여름, 무슨 수로 거금 1만원을 마련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1만원을 투자하여 '야전'을 샀다. 별 좋은 날이면 우리는 그것을 들고 근처 야산으로 어슬렁어슬렁 몰려가곤 했다. 한 놈은 적당한 술을, 다른 한 놈은 적당한 안주거리를, 다른 한 놈은 야전과 LP빽판을 들고.... 우리는 몇 잔의 취기에 '야전'을 틀어 놓고는 몸을 놓아버렸다. 별 좋고 술 좋고 친구 좋고 음악 좋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건가." 작고한 문화평론가 이성욱(1960-2002)이 회고한 '야전' 시대 어느 별밤 이야기다.(유고집'쇼쇼쇼') 1954년생 가수 김창완도 야전시대의 일원이었다. " '나쇼날 야전' 하나 있으면 온갖 야유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해마다 수백 명 목숨 앗아간 '침묵의 저승사자'

해마다 수백 명 목숨 앗아간 '침묵의 저승사자' 연탄은 화력이 강하고 가격이 저렴하여 온돌에 쉽게 적용시킬수 있어 대표적 가정 연료가 됐다. 장작으로 밥 짓고 불 때던 주부들에게 '부엌에서 온종일 물이 끓고 필요함 때면 언제나 불을 쓸 수 있는 연탄 아궁이는 나일론 양말 못지않은 복음이었다."(박완서. 50년대 서울거리') 한편으로 추운 겨울 새벽 연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연탄불이 꺼지면 한기에 떨어야 했고 옆집에서 불씨를 빌리기도 했다. 전직 공무원 P씨(69)의 회고다. "부부가 새벽 잠결에 신경전을 벌였지요. 자는 척도 하며 서로 미루곤 했지만, 결국 하루씩 도맡는 당번제를 시행했습니다. 1986년 서울의 연탄사용 가구수가 234만에 달할 정도였지만, 경제 수준이 향상돼 가스나 기름보일러가 널리..

넝마주이

넝마주이 "소쿠리에 애들 담아간다" 유언비어도 웬만한 동네에는 그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 커다란 소쿠리를 어깨에 걸머지고 집게를 들었다. 걸친 옷은 그야말로 넝마 수준이고 씻지 않은 거무튀튀한 얼굴에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고개는 푹 숙였다. 넝마, 헌 종이, 빈 병, 기타 고물을 집게로 집어 소쿠리에 넣는다. 특히 집대문 옆 콘크리트 쓰레기통 안팎을 꼼꼼하게 뒤진다. 소리없이 나타났다 사라져도 그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들을 일컫는 말은 넝마주이, 양아치, 씨라이꾼 등이었다. 양아치는 동냥아치에서 온 말이니 거지의 다른 표현이라 하겠는데 , 쓰레기에 가까운 잡동사니를 줍더라도 어디까지나 구걸하는 게 아니라 자력자조하려는 이들이니 부적합한 명친인 셈. 그때만해도 집집마다 빈 병,..

백색전화

백색전화 전화 회선 부족하던 시절......'끗발'의 상징 "그 집에는 주인집 장 씨네에도 없는 백색전화라는 게 있을 정도로 끗발이 세었다. '''''백색전화가 어떻게 생겨부렸던가? 웬걸 깜장인 게로 흑색전화인가부던데? 분명히 백색전화라고 혀서 전화 중에서 젤로 비싸다 혔는디, 사람들이 잘못 알아부렀나? 그때가지만 해도 백색전화니 천색전화니 하는 말들이 색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남에게 어느 만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가 하는 조건을 뜻하는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김소진 '장석조네 사람들') 1960년대 우리나라 전화 사정은 극도로 열악했다. 회선 공급과 교환시설 부족으로 수요에 솔급이 미치지 못하니 권리금 붙은 전화 매매와 매점매석, 전화가입권 담보 사채업, 무단 임대까지 성..

상이용사

상이용사 나라 위해 '전쟁의 상처' 짊어진 그들 오른팔이 잘려 갈고리를 대신단 상이군인이 와서 술하고 돈을 내놓으라며 번득이는 갈고리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대고 떼를 부린다. 연씨는 상이군인을 이렇게 다독거린다. "왜 비굴하게 그들에게 당신들 때문에 불구가 됐으니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하는 구차한 손을 벌린단 말이오? 총대 메고 싸우던 시절의 기백으로 되돌아가 남은 수족이나마 성한 사람들보다 갑절로 더 움직이면서 장하게 살아봅시다." 김소진의 장편소설 '장석조 네 사람들'의 한 대목이다. 팔에 갈고리를 달거나 의족을 하고 목발을 짚기도 한 상이용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부정적이다. 남의 집 대문을 무단으로 밀고 들어와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다짜고짜 돈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