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황혼 '100년전 우리는'

63년 동안 일기 쓴 농사꾼

중전마님 2019. 7. 6. 21:59


63년 동안 일기 쓴 농사꾼


"날씨가 맑고 차갑다. 서풍이 서서히 불어 왔다. 하늘에 한점의 구름도 없다."

이 글은 '심원권(深遠權)일기"<작은 사진> 1909년 1월1일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심원권은 조선 철종 때인 1850년 울산에서 태어나 1933년까지 산 향반(鄕班. 향촌의 양반)이다.

그는 과거(科擧)를 준비하다가 26세 때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기록정신이 대단했다.

스무살 때부터 사망 때까지 63년 동안, 부모 상을 당한 3일을 제외하고 매일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는 한 학자에 의해 발견돼 현재 경기도 분당 토지박물관 1층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그의 일기는 날씨로 시작한다. 그의 날씨 기록은 지금의 일기예보보다 자세하다. 

가령 맑음도 그냥 '맑음'이 아니라  '맑고 차갑다(淸寒)' 거나 '맑고 따듯하다(淸溫)'고 표현 했다.

'새벽에 가랑비' '흐렸다 맑음(半隂半陽)' 등의 표현도 있다.

날씨가 농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탓이다.

그의 농지는 처음엔 50-60마지기였지만, 집안 대소사를 치르면서 나중에 20-30마지기로 즐어들었다.

쌀,보리, 무, 고구마, 감자,담배 등을 재배했다. 당시 농사는 대부분 수작업에  의존해

무척 힘들었다. 영국군인 알프레드 캐번디시(1859-1943)가 1889년 수집한 농촌풍경 그림<큰 그림>

(명지대-LG 연암문고 소장)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심원권은 주경야독하며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에서 주목할 점은 열흘 간격으로 쌀 등 주요 곡물의 물가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가령 1909년 9월4일 일기에는 '쌀 한되 1냥, 보리 한되 2전3푼, 밀 한되 8전'으로 기록돼 있다.

요즘에는 보리쌀 값이 쌀값을 능가하지만, 당시에는 쌀이 훨씬 비쌌다.

일기가 시작된 1870년 9월15일 쌀값이 2전이었던 것이 39년 후 1냥으로 뛴 것을 보면,

 조선말기 상당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쌀 신품종으로 일본벼가 적극 도입되었는데 이는 생산량과 수출가격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전후한 그의 일기는 격동기를 산 평범한 농민의 의식을 보여준다.

1909년 마지막 날 그는 "여력이 있으면 시를 읊고 독서를 하자"고 썼고,

1910년 7월7일 칠석(七夕) 때는 "평생의 뜻은 근검(勤儉)이면 되고, 온갖 일에는 인내가 상책이다" 고 썼다.

그의 일기에 의병투쟁, 안중근 의거, 한일합방 등 정치적 사건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911년 1월30일자에서 "어지러운 이 세상 일, 볼 수는 있너도 말할 수는 없구나"라고 썼다.

망국에 대한 감정은 있되 참고 숨겼다고 보아야 한다.

심원권 같은 농민들은 망국의 한을 안으로  삭이고 정치 격변을 견디며 자녀 교육에 힘 썼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 세대는 일제시대를 살아남아 해방 후

국가재건의 역군이 되었다.(이헌창 고려대교수. 경제학)


2009년 9월8일 (A34)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