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척후대', 스카우트의 원조
"군인 같은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나 부인이 위험한 일을 당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를 볼 때 속히 가서 그것을 구제하고 그 밖에도 무슨 일이든 사회의 유익한 일이면 하도록 주선해 주는 것입니다"
이만큼'보이스카우트'를 쉽게 설명한 글이 또 있으까? 일제시대 YMCA 소년부 간사를 맡고 있던
정성채(鄭聖采, 1899 - ?)<사진 오른쪽> 선생이 1923년 1월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말한 내용이다.
정 선생은 일제시대 청소년 운동가다. 1899년 4월 서울 종로구 권농동에서 기독교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경신학교에 다녔다.
야구를 좋아하고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곤 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한 게 문제가 되어 학교를
그만뒀다. 해외의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전 선생은 1921년 YMCA 소년부 간사로 발령받은 뒤 본격적으로
창설 준비에 나서 이듬해인 1922년 청소년 17명을 이끌고 한국 최초의 스카우트인 '소년척후대'를 창설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조철호(1890-1941)<사진 왼쪽> 선생도 학생 8명으로
'조선소년군'을 만들었다. 1924년 3월 두 단체가 힘을 합쳐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이 출발했다.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초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단체 운영을 둘러싸고 두 지도자 사이에 노선 차이가 생겨
1년여 만에 원래대로 갈라섰다. 현재 한국스카우트연맹은 소년척후대와 조선소년군을 둘 다 '한국스카으트의 원조'로 인전하고
있다. 정 선생과 조 선생 모두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방편'으로 청소년 운동을 펼쳐 일제 말기 일본 경찰에게 수시로
곤욕을 치렀다. 해방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정 선생은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 소식이 끊겼다.
창설자를 잃은 뒤에도 한국스카우트 는 풍파를 헤치며 회원 36만명을 거느린 단체로 성장했다. 1991년 전 세계스카우트드의
'올림픽'으로 꼽히는 세계잼버리대회를 치르고, 2002년에는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단체 이름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 '보이(boy, 소년)를 떼어냈다. 단,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은 한국스카우트연맹과는
완전히 다른 단체다. 정 선생의 부인과 장남은 1993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정 선생도 고인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는 26일 서울 수송교회에서 첫 추모예배를 갖기로 했다,(정지섭 기자)
2009년 9월 23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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