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본'건국60년, 60대사건'

피와 바꾼 달러, 가난 탈출의 종자돈으로

중전마님 2020. 6. 8. 13:45

피와 바꾼 달러, 가난 탈출의 종자돈으로

[19] 월남 파병

1964년 봄, 주미대사 김정렬은 워싱턴에 온 주독대사 최덕신을 통해 대통령 박정희가 내린 특명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에게 월남(越南. 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시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미국조차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파병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월남이 공산화된다면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위협받을 것이 분명하고,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려는 구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한국 정부의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됐다. 1964년 9월에 이동병원 부대 등 140명이 처음으로 월남에 갔고, 1965년 2월 2000명의 공병,수송부대가 파견됐다. 마침내 10월12일,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로 이뤄진 전투부대 2만명이 30만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본격적인 파월(派越)의 막을 올렸다. 1973년 3월 철수를 끝낼 때까지 모두 31만 2853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들은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 1000여 명의 베트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줬다.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월남으로의 수출이 급중했다. 군인, 노동자가 받은 봉급과 현지 한국 기업의 사업수익까지 합하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재원이 됐다. '월남'이란 말은 시대를 대변하는 코드였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희트했고, 군가 '맹호는 간다'가 애창곡이 됐다. '월남치마'가 유행했으며 '월남뽕' 이라는 게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번영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와 희생이 필요했다.  4600여 명의 장병이 이역만리에서 전사했고, 1만 70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枯葉劑) 는 아직도 수많은 참전 용사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008년 7월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