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마다 꼭 열렸던 '웅변대회' 열변 토하다 쓰러져 사망하기도
1958년 3월3일 서울 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3.1 정신 앙양 웅변대회' 도중 사고가 터졌다.
'가정 윤리 재건과 여성의 사명' 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선 45세 여성 김모씨가 온 힘을 다해 열변을
토하다가 쓰러져 뇌출혈로 사망했다(조선일보 1958년 3월5일자). 김씨는 3.1절에 만세를 30번이나
불렀을 정도로 나라 걱정을 많이 한 '우국(憂國)부인' 이었다. 주변에선 "웅변에 너무 열을 올리다
화를 입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회 주최 측인 대한부인회는 김씨의 장례를 부인회장(葬)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웅변대회가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로 열리던 시대의 풍경이었다.
구름 같은 청중 앞에 서서 주먹 불끈 쥐며 사자후를 토하는 웅변대회는 오늘날에도 가끔 열리지만
화술 경연장 같은 색채가 짙다. 하지만 반세기 전 웅변대회는 대(對) 사회 발언의 광장이기도 했다.
1966년의 경우 200-300명이 출전한 전국 웅변대회가 15차례가 넘게 열렸다.
장소는 대개 학교 운동장이었다. 아무도 마시지 않지만 연단엔 늘 양은 물주전자가 구색으로 놓여 있었다.
"이 연사, 여러분께 외칩니다!" 라는 열변과 박수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동네 골목까지 퍼졌다.
'광복절' '학생의 날' '정부 수립 기념일'은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 '부처님이 출가한 날'에도
기념 웅변대회가 열렸다. 웅변능력은 한대 정치인들에게 필수였다. 고(故) 김영산 전 대통령이 대학 2학년 때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나갔다가 장택상 당시 외무부 장관으로부터2등상인 외무부 장관상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릴 적부터 웅변에 능했고,젊은 날 웅변전문 학원 원장까지 지냈다.
웅변대회는 가끔 정치 세역의 입김에 휘둘렸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열린 '시국 학생 웅변대회'에선 어린 연사들이 "이 대통령의 3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발언을 이어 가 야당이 강력반발했다.
오죽하면 1966년 한국웅변가협회가 출범할 때 결의한 3개 항 중 첫째는 '정치적 중립'이었다.
그래도 정권 차원에서 추진한 정책들은 계속 웅변대회의 주제가 됐다. 5.16후엔 '재건국민운동',
유신 시대엔 '반공' '새마을'을 소재로 학생 연사들이 열변을 토했다. 제5공화국 시절인 1982년엔 금융업계
정화추진위원회 주최로 '금융계 의식 개혁 웅변대회'도 열렸다.
내용 불문하고 과장된억양으로 목청껏 언성을 높이는 것을훌륭한 연설처럼 여기는것도 옛 웅변의문제였다.
1958년 '어머니 날'기념 웅변대회에서 연사들은 조곤조곤 돌아봐야 할 어머니의 사랑조차도 격정적 웅변조로 토해내 웃음을 샀다."역경에서 허덕이는 우리의어머니!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국가,민족을사랑하고,
전 인류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조국을 건지는 길이며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겉만 뻔지르르한 웅변대회식 말투가 먹히는 시대는 오래전 지났다.
요즘 '스피치 학원'에 수강생들이 몰린다지만 옛 웅변 학원과는 다르다. 한 때는 '쇼 호스트 화술'이나
'아나운서처럼 말하기' 같은 과목이 있다더니 요즘엔 소개팅에서 이성의 호감을 사는 화술, 면접에서 자기
생각을 밝히는 법, 모임에서 좌둥을 웃기는 유머 화법까지 가르친다고 한다.
앞으론 또 어디로 튈지 궁금하게 만드는 웅변, 화술의 진화다.(사료연구실장)
조선일보 2016년3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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