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美 외교의 주역' 역대 최장수 외무부 장관
박동진(91) 전 외무부 장관이 11일 노환으로 숨졌다. 박 전 장관은 1975-80년까지 4년9개월간 외무부 장관으로 기록됐다. 1943년일본 주오(中央)대 법대를 졸업한 박 전 장관은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를 거쳐 1951년 외무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5.16직후인 1961년 외무 차관을 맡았고 주(駐) 월남 대사, 주브라질대사,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주유엔 대사 등을 역임했다. 다자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내 1975년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박 전 장관은 1970년대 후반 한.미 관게가 급변하던 시기 대미 외교를 지휘했다. 당시 한. 미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 이에 대응한 한국의 독자 핵개발, 미국의 청와대 도청 의혹,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미국망명 등을 둘러싸고 연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박 전 장관은 1976년 한국의 대미(對美) 로비 사건인 '코리아게이트' 로 촉발된 미국 내 반한(反韓) 정서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 대통령(1977-81년 재임)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19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등 격변기에 한. 미 관계의 원활한 조율을 통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일도 맡았다. 박 전 장관은 '배짱 있는 외교관' 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장관 재직 때였던 1979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측에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하라는 발언을 해 발단했던 김영삼 제명 파동 당시, 미국 인사들의 반응을 바탕으로 박 대통령에게 제명안을 처리하지 말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박 전 장관은 생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까 역시 올바르게 판단하는 게 처음이고, 일단 마음이정해져 밀고나가야 할 때는 배짱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저전에서 "외교관은 총없는 전사(戰士)지만 성공적인 외교는 수십만명 대군이 동원되는 전쟁도 막을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썼다. 장관 퇴임 후에는 민정당 전국구로 11,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국토통일원 장관, 주미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등도 지냈다.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도 지냈다.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도 맡았다.
청조근정훈장등을 수훈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유충숙여사와 1남3녀가 있다. 유 여사는 현민(玄民) 유진오 선생의 딸이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이며 장레는 외교부장(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발인은 14일 오전8시이며 장지는 국립현충원이다(박수찬 기자)
조선일보
2013년11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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