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모던 조선'

87년전 本社 리디오 시험반송...청취장에 수만명 몰려

중전마님 2021. 3. 17. 16:07

 

87년전 本社 라디오 시험방송. . . . 청취장에 수만명 몰려

1924년 12월17일 오후 1시, 영화를 상영하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데도 경성 관철동의 영화관 '우미관(優美館)'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 방송시험', 즉 라디오 시험방송을 들어보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보다 한달 전인 11월 총독부 체신국이 청사(현 광화문우체국 자리)에 방송실을 차려놓고 음악, 연극 등을 최초로 시험 방송하는데 성공했지만, 민간이 주도한 시험방송은 조선일보사가 처음으로 해냈다. 1927년 경성방송이 개국하여 정규방송 시대가 열리기 3년전이었다. 수표동 조선일보사의 기와집 사옥에서 쏘아 올린 전파가 우미관 무대 대형수신기의 나팔에서 흘러나왔다. 조선일보 사장인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의 연설이 이어지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조선말'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3일간 이어진 시험방송의 프로그램은 다체로웠다. 이동백(李東伯)송만갑(宋萬甲) 박녹주(朴綠珠) 등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와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국립국악원의전신)

 명수들의 거문고,퉁소,해금 등 연주가 방송됐다. 동요 작곡, 작사가이자 성악가였던 21세 청년음악가 윤극영이 마이크 앞에서 '반달'을 불렀고, 26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도 조선일보 전파를 탔다. 리디오 시험방송 청취장에 몰린 인파는 "수만 명' 아었다고 당시 본지는 보도했다. 입장권을 나눠주던 남대문통 조선일보 경성판매소 앞은 인파 때문에 전차 통행이 일시 중단됐다. 본지 12월 18일자의 '경이의 눈 경이의 귀!' 기사에서 한 여성 활동가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올시다. 내 평생에 이 같은 신기한 조화를 볼 줄은....이라고 경악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경성방송 개국 전까지 전국 수십 개 지역을 돌며 라디오 시험 방송을 계속했다. 방송문화진흥회가 펴낸 '한국방송총람'에 따르면 일제하 조선일보사는 방송을 함께 경영하려는 생각이 잇었으며, 실제로 총독부에 방송사업 허가 신청도 냈다. 그러나 총독부는 친일(親日)방송인 경성방송만 허가했다. 비록 방송국 개국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1924년 부터 시작된 조선일보의 우리말 라디오 시험방송은 정규방송보다 앞서 동포들에게 '첨단 미디어' 라디오를 맛보게 했다. 당대의 어떤 논객은 "라듸오 문명으로 인하여 세계는 갱생(更生)하였다. 과거에 있어서 문명이라 참칭하던 모든 것이 이제는 라듸오 앞에서 오직 그 잔해를 남길뿐이다! 아아 세계의 인류는 깃버하라! 라뒤오! 라듸오! 라듸오!"(1925년7월29일자 조선일보 '라듸오 문명 및 기타에 대한 집감(雜感)')라고까지 흥분했다. 이렇게 라디오는 1920-30년대를 관통하며 첨단 과학문명의 아니콘이 되어갔다.(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조선일보2011년3월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