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모던 조선'

영화관 남녀석 구분....남자들,영화대신'부인석'구경도

중전마님 2022. 3. 26. 22:52

 

영화관 남녀석 구분...남자들, 영화 대신 '부인석' 구경도

서울에 등장한 최초의 상설 영화관은 1910년 2월18일, 지금의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문 영 600석의 경성고등연예관이다. 대중들이 좀 더 다채롭게 영화를 골라가며 즐기게 된 건 이로부터 10년쯤 뒤부터다. 1918년 단성사, 우미관, 황금관이, 1924년에는 조선극장까지 개관하면서 영화관 경쟁시대가 본격 개막됐다. 바로 이 무렵 1920년 태어난 조선일보는 영화 문화가 뿌리내리고 꽃피는 것을 초창기부터 지켜보며 기록했다. 80-90여년 전 영화관 풍경 중 오늘의 멀티플렉스 관객들에게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사실은 남녀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모던 뽀이'와 '모던 걸'들은 영화관 데이트를 할 때도, 서로 멀리 '이산 커플'이 되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따로 앉는 '부인석'에 관한 언급은 조선일보 1930년 10월26일자 5면 '만추풍경' 에도 보인다. 영화가 시시했는지, 남자 관객들 시선이 스크린보다도 부인석의 여성들 쪽으로 쏠리는 풍경을 유머러스한 그림과 글로 이렇게 묘사했다. "텅 비인 극장에도 부인석에 녀자 한 명만 빛최이면..... 남자들은 부인석 구퉁이에 산을 이룬다" 영화관 남녀석을 나눈 건 풍기문란 행위를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불 꺼진 공간에서 남녀가 나란히 앉아 활동사진을 본다는 것은 당시의 도덕적 기준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딱 좋은 곳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량학생 단속 때마다 경찰관들이 카페, 빠와 함께 필수적으로 덮치는 곳이 영화관이었다. (조선일보1940년 2월9일자 '불량 학생 청소 공작') 그래도 관객들은 문명이 전해준 이 놀라운 오락으로 점점 몰렸다. 1939년 7월11일자 본지는 '무척 구경을 조하한다!'라는 기사를 통해 1938년 한해 경성이 영화관 입장자가 394만 4157인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는 총관객을 당시 경성부 인구(75만명)로 나눠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전부 일 년에 다섯 번씩은 영화 구경을 한 셈"이라고 했다. 1940년 2월7일자 본지의   '....늘어가는 서울의 영화관 손님' 기사는 영화관계 증가율이 인구증가율의 2배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영화가 인기를 끌자 모던 뽀이, 모던 걸들 사이에서 외국 스타의 의상이나 안경을 본뜬 패션까지 유행했다.  심지어 '미국 활동사진'을 본떠 패션까지 유행했다.  심지어 '미국 활동사진'을 본 더 길거리에서 결혼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고 본지 1930년 11월 25일다 석영의 '1931년이 오면'은 전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에서는 길에 지나가는 녀인을 쪼차가서 결혼신청을 하야 정신병자로 몰린 일이 있다" 면서 "1931년에는 길거리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사람이 없으란 법이 없다" 고 꼬집었다.(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조선일보2011년 3월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