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사람 손 떨리게 만든 전보
'부친사망급래' 등 말 줄이기 필수
전쟁 중이던 1951년 2월초, 학도의용대원으로 복무하고 있던 23세의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조부위독' 이라는 긴급전보(전보)를 받았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할아버님은 건강했다. 아들을 빨리 장가보내고 싶던 YS 부친은 아들이 안 가겠다고 버티자 맞선을 보게하려고 가짜 전보를 친 것. 그렇게 불려온 YS가 만난 처녀가 훗날 퍼스트레이디가 된 손명순이다(조선일보2011년3월5일 자). 꿈적 않던 아들을 움직인건 속임수였지만, 연락 수단이 '전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30여년 전 이 땅에 등장할 때부터 전보란 늘 받는 사람 손을 떨리게 만든 긴급 연락의 대명사였다. 활자로 또박또박 찍힌 몇 글자의 메시지가 주는 엄중함은 편지나 전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전인 1970년대 후반까지, 전화 없는 사람에게 가장 빨리 연락할 수단은 전보밖엔 없었다. 요금은 글자 수대로 부과됐기에 어떻게든 말을 줄여야 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빨리 집으로 오너라"라는 내용은 "부친사망급래"다. 지방 출신 학생들이 고향에 보낸 '사전대금천원송금요망' 전보는 "용돈이 떨어졌으니 부쳐 주세요"라는 뜻이었다. 전보의 전성기 이 던 1975년 전보 이용 건수는 6500만 건이나 됐다. 편지는 걸어서 배달해도, 전보는 자전거로 전했다. 종일 안장에 앉아 500여통씩 나르던 배달원들은 엉덩이에 못이 박였다. 1964년에는 자전거타던 배달원 중 37명이 치질에 걸렸다.당국도 가끔 실수를 했다. 1969년 10월 경남의 할머니가 서울의 아들 집을 방문하기 전 '모친상경' 이라고 전보 신청을 했는데 '모친사망' 으로 잘못 배달됐다. 장례 준비까지 시작했던 아들은 당국 잘못이 빩혀지자 국가를 상대로 45만원(약 2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전보는 목소리도 필적도 전해 주지 않으니, 남을 사칭해 보낼 수 있다는 허점도 있었다. 1957년 6월 지방 경찰관의 음주 행패 사건을 기자들이 취재해 송고하자 다급해진 지서 주임이 잔꾀를 부렸다. 조선, 동아, 경향 등 3개 신문사 지국장을 사칭해 '보낸 기사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으니 보류 바람' 이라고 언론사 본사에 전보를 친 것. 결국 허위가 들통나 경찰서장이 사과했다. 1997년쯤부터 전보는 더 이상 긴급 연럭용으로 쓰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 삶의 온갖 경조사(慶弔事) 때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조심조심 봉투를 뜯어 꺼내 보는 종이 한장의 느낌은 액정 화면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2015년 9월9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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